'걷기'는 2000년대 이후 널리 확산되면서 개인의 습관 변화는 물론 사회 여러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걷기 여행이 유행하면서 지방자치단체는 너나없이 올레길을 벤치마킹한 도보로를 만들었다. TV 건강 프로그램도 걷기라는 소재를 자주 다룬다. 계절마다 최첨단 기술을 적용한 트레킹화가 쏟아져 나올 정도로 걷기는 소비산업 부문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아이템이 됐다.

출판계에서도 걷기가 주요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매달 한두 권의 걷기 관련 책이 나온다. 올해 들어 < 워킹 다이어트: 걷는 만큼 빠진다 > (리스컴), < 걸어유 충남도보여행 > (상상출판), < 걷고 느끼고 사랑하라 > (푸른영토) 등이 출간됐다. 소설가 정유정씨도 네팔 히말라야 트레킹을 소재로 쓴 에세이 < 히말라야 환상방황 > (은행나무)을 내놓았다. 이 책은 출간과 함께 주요 서점의 종합 베스트셀러 순위에 올랐다.

한 여성이 26일 북한산 둘레길을 걷고 있다. 최근 나온 철학과 사유를 키워드로 하는 인문학 책들은 걷기 출판 트렌드의 확장을 보여준다. | 김정근 기자 jeongk@kyunghyang.com

걷기 여행의 대표 코스인 스페인 산티아고와 제주 올레는 오래된 인기 키워드다. 지난 3월 출간된 < 느긋하게 걸어라: 산티아고 가는 길 > (복있는사람)을 비롯해 여행과 종교 분야의 산티아고 관련 책은 54종이 나와 있다. 제주 올레길 관련서도 최근 나온 < 흔들리지 않는 건강 99세를 위한 과학 > (제주대 출판부) 등 50여종에 이른다. 올레와 산티아고는 걷기 출판 트렌드의 진원지다.

이수현 교보문고 브랜드관리팀장은 "2000년대 산티아고 순례길, 올레길 관련 책들이 인기를 끌면서 출판 트렌드가 형성됐던 것 같다. 여행서뿐만 아니라 걷기를 통한 자연 치유 등 건강, 명상 분야의 걷기 책들이 줄곧 인기를 얻고 있다"고 말했다. 2003년 출간된 베르나르 올리비에의 도보 여행기 < 나는 걷는다 > (효형출판) 역시 국내 여행가들과 출판계에 많은 영향을 준 책으로 꼽힌다. 올리비에는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실크로드 걷기를 구상했다. '걷기 명상'으로 유명한 틱낫한 스님은 신간 < 타인이라는 여행 > (알에이치코리아)에서 걷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걷기 책이 여행·건강·종교·명상 분야에 집중된 가운데 철학과 사유의 걷기를 강조하는 인문학 분야의 걷기 책도 나오고 있다. 이달 출간된 두 권의 책은 걷기 출판 트렌드의 확장을 보여준다. 프랑스 철학자 프레데리크 그로의 <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 (책세상)은 '걷는 것은 스포츠가 아니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산업과 소비의 대상이 된 '걷기'를 비판한다. "우리는 혁신적인 신발, 매우 튼튼하면서도 가벼운 양말, 다용도 배낭, 기능성 바지 등 새로운 시장을 만들려고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 이제는 걷는 게 아니라 '트레킹을 한다'가 되었다."

걷기를 철학적 행위이자 정신적 경험이라고 규정하는 그로는 '고통의 순간에 오로지 걷고 또 걸은 니체' '바람 구두를 신은 천재 시인 랭보' '몽상하는 고독한 산책자 루소' '자본주의의 아케이드를 거닌 벤야민'의 이야기에서 걷기의 철학적 방법론을 끄집어낸다. 김미정 책세상 인문사회팀장은 "한국에서 걷기 열풍은 주로 건강에 대한 관심 고조나 아웃도어 패션 유행처럼 소비적 측면이 크다"며 "철학적, 사색적인 이야기로 걷기의 사유를 확장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해 번역, 출판했다"고 밝혔다.

스테디셀러인 < 걷기예찬 > 의 프랑스 사회학자 다비드 르 브르통은 '걷기예찬 그 후 10년'이란 부제의 < 느리게 걷는 즐거움 > (북라이프)을 이달 초 냈다. 위고, 소로, 헤세 등 걷기를 사랑했던 여러 작가들의 작품으로 인문학적 걷기의 사유를 펼친다. 또 인문학 분야의 걷기 책으로 '걷는 사회학자' 정수복씨의 < 파리를 생각한다 도시 걷기의 인문학 > (문학과지성사·2009), 철학자 크리스토프 라무르의 < 걷기의 철학 > (개마고원·2007), 생물학자 이브 파칼레의 < 걷는 행복 > (궁리·2001)도 꼽을 수 있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은 "인간 행위 중에서 가장 단순한 걷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인문학 분야의 걷기 책들은 자신에 대한 성찰과 사유를 강조하는 출판 흐름과 맞물려 있다"고 분석했다.

<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

출처 : http://book.daum.net/media/detail.do?seq=70477555